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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우리를 지켜온 힘, 세계로 향하는 문화의 원천, 한글
2024-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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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번째 한글날, 성북사람들과 함께 지키고 가꿔 온 아름다운 한글의 기록을 찾아봅니다.

한글날

‘오직 하나의 큰 글’, 한글

한글날은 한글의 창제와 반포를 기념하기 위해 지정된 국경일이다.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우리 말을 지키고 겨레의 넋을 살리고자 1926년 조선어 연구회에서 ‘가갸날’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기념하기 시작하였고 1928년 기념식부터 오늘과 같은 ‘한글날’로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글의 생일, 10월 9일

처음의 ‘가갸날’은 음력 9월 29일이었다. 이후 1940년에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이 발견되었는데 책의 말문(末文)에 ‘정통(正統) 11년 9월 상순(상한) - 세종 28년 9월’이라고 적혀 있다. 여기서 정통(正統) 11년(세종 28년)은 1446년을, ‘상순’은 1일부터 10일까지를 말한다. 당시 조선어학회에서는 ‘상순’의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10일을 《훈민정음》 해례본 반포일로 보았고, 이에 따라 1945년부터는 날짜를 양력으로 바꿔 10월 9일에 기념식을 갖기 시작했다.


북한의 한글날은 1월 15일

《세종실록》 1443년 12월 31일자에는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으셨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북한에서는 이 기록을 근거로 12월의 중간인 12월 15일을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날로 보고, 양력으로 환산한 1444년 1월 15일을 ‘훈민정음 창제일’로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말과 우리글 연구
국어연구학회에서 한글학회까지

한글날의 시작을 알린 ‘조선어 연구회’는 국어 연구를 위해 1908년에 주시경(周時經) 선생이 조직한 ‘국어연구학회’를 계승한 학술단체이다. 1910년대에는 ‘국어’라는 말이 한국어, 한글이 아니라 일본어를 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름을 바꾸었지만 ‘조선어 연구회’는 ‘가갸날(한글날)’ 기념 행사를 진행하는 것 외에도 잡지 《한글》 창간, 『조선어사전』 편찬 시작 등 한글 보급에 힘을 썼다. 그리고 1931년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일본의 민족말살 통치로 한국어와 한글 사용을 금지하였던 1930년대를 굳건히 버티며 한글과 우리말을 수호하며 연구활동을 이어갔다.

1942년, 일제에 의해 학회의 주요인사와 관계자가 모두 검거되거나 투옥되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활동이 중단되는 듯 했으나 광복과 함께 다시 재개하였고 1949년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조선어학회에서 발행한 한글잡지
▲ 조선어학회에서 발행한 한글잡지
〈출처 : 국립한글박물관〉

1940년 조선어학회에서 발행한 개정한 한글 맞춤범 통일안
▲ 1940년 조선어학회에서 발행한 개정한 한글 맞춤범 통일안
〈출처 : 국립한글박물관〉

성북의 이극로, 최두선, 안재홍, 서승효 등의 인물이 조선어학회와 함께하거나 관계하여 활동을 하였고 성북구민들에게 방우산장과 청록파 시인으로 더 익숙한 조지훈은 아버지 조헌영의 뒤를 이어 조선어학회에 가입하고 『큰사전』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지켜진 한글, 그리고 한글로 완성된 기록과 문화예술 작품들을 성북구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성북 간송미술관과 고려대학교는 한글로 우리말 한자의 우리 음을 표기한 《동국정운》, 중국어 한자의 발음을 한글로 표기한 《홍무정운역훈》, 한글창제 이후 간행된 최초의 한글문헌인 《용비어천가》와 1907년 국문연구소의 활동 기록을 담아 개화기 국어학사의 귀중한 자료가 되는 《국문연구안》 등 귀중한 한글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이중 용비어천가는 한글 사용의 가장 오래된 활용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주해 속에 나오는 고유명사, 관직명이 한글로 표기되어 있어 중세국어를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동국정운
▲ 동국정운
〈출처 : 국가유산청〉

홍무정운역훈
▲ 홍무정운역훈
〈출처 : 국가유산청〉

용비어천가
▲ 용비어천가
〈출처 : 국가유산청〉




감옥에서도 한글 사랑,
안재홍

독립운동가이자 일제강점기 내내 사회단체 활동과 언론활동, 고적지 답사, 어문 연구 등의 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안재홍은 1919년부터 광복까지 일제총독부에 총 9번 체포되고 옥고를 치렀는데, 1936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수감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동안 조선 후기 학자인 정약용의 저술을 총정리한 문집인 《여유전당서》의 일부를 한글로 해석, 번역하는 작업을 이어나갔다고 한다. 1940년대부터는 대외활동 대신 한글연구비를 지원하는 등의 활동을 이어갔는데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체포되어 9번째 옥고를 치르게 된다. 그가 살던 성북구 돈암동 아리랑고개에서 민세 안재홍 선생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 안재홍 선생 동상을 보면 왼팔과 다리 등 일부가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안재홍 선생의 희생을 표현하고자 의도적으로 생략한 것이라고 한다.

민세 안재홍 동상
▲ 민세 안재홍 동상
〈출처 : 성북문화원〉




성북동 한옥 방우산장,
조지훈

시인이자 학자, 교육가이다. 광복 이후 한글 학회 『국어교본』 편찬원과 조선어학회 『중등국어교본』 편찬원, 진단학회(震檀 學會) 『국사교본』 편찬원 등으로 활동하며 우리말 회복운동에 열정을 쏟는 한편 성북동 방우산장에서 박목월, 박두진과 모여 의견을 나누며 『청록집』을 간행, 많은 작품을 남겼다. 『청록집』이라는 제목은 박목월의 시 「청노루」에서 따온 것인데, 이때부터 그들 세 명의 시인은 ‘청록파’로 불리게 된다.

현재는 그가 살던 한옥 방우산장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조지훈 시인을 기념하고자 만들어진 ‘시인의 방-방우산장 건축조형물(성북동 142-1번지 가로길)’이 있어 시인을 기억할 수 있다.




덕온공주의 아름다운
한글궁체

덕온공주는 순조의 셋째 딸이자 조선의 마지막 공주로 어머니는 순원왕후이다. 매년 장위동에서 ‘장위부마축제’가 열리는데 바로 덕온공주와 부마 남녕위 윤의선의 혼례를 재현하는 행사이다.

덕온공주는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여러 편의 한글 편지와 「자경전기」, 「춘련」 등 아름다운 필체의 한글 서예 작품을 다수 남겼다. 그의 단아하고 기품 있는 궁체 글씨는 당대 한글 서예의 가장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덕온공주와 아들 윤용구, 손녀 윤백영이 남긴 다양한 한글 책과 편지, 서예작품 등에서는 왕실 가족들에게 이어져 온 정갈하고 아름다운 한글 궁체를 확인할 수 있다.

덕온공주가 한글로 풀어 쓴 아버지 순조의 자경전기
▲ 덕온공주가 한글로 풀어 쓴 아버지 순조의 자경전기
〈출처 : 국립한글박물관〉




문인들의 아지트,
수연산방

방우산장 이전에도 성북동에는 많은 문인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아지트 같은 곳이 있다. 상허 이태준이 1933년부터 1946년까지 살며 많은 문학작품을 집필한 곳이자 구인회의 주요 활동무대가 되기도 한 수연산방이 그곳이다. 구인회의 주도로 문예지 『문장』이 발간되었는데, 1930년대 이후 한글과 민족문학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는 상황에서도 당대 최고의 소설가와 신인의 작품을 수록하며 우리말, 우리글을 지켜왔다. 조지훈과 박목월, 박두진도 『문장』을 통해 등단한 문인들이다.

2024년 10월호
2024년 10월호
  • 등록일 : 2024-09-25
  • 기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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