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 중심부에 있는 미아리고개는 예부터 서울과 외곽지역을 잇는 주요한 진입로였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38도 분계선의 모든 전선이 무너지자, 국군은 북쪽에서 서울로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진입로인 미아리고개에 저지선을 형성합니다. 6월 27일 이응준 소장의 국군 제5사단과 유재흥 준장의 제7사단이 미아리고개의 좌·우측 방어를 나누어 맡고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미아리 전투 목격자 장남용 씨는 국군이 트럭에 폭탄을 실어 북한군 탱크를 막았고, 트럭의 불길이 잦아들 때까지 북한군이 미아리고개를 넘을 수 없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러한 국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은 28일 새벽 미아리고개를 넘어 돈암동으로 진입합니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정치인, 교육자, 의사 등 약 1,500명을 가두면서 서울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혼란이 수습될 새도 없이 미아리고개는 다시 눈물의 고개가 됩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타격을 받은 북한군이 우이동 방면으로 퇴각할 때 주요 인사들도 함께 북으로 데려가면서 미아리고개가 마지막 이별의 장소가 된 것입니다. 독립운동가 안재홍의 부인 김부례 여사는 남편이 끌려가면서 차 뒤쪽 창문을 통해 자신을 내다보며 손짓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회고하였습니다. 작사가 반야월 씨는 전쟁 중 딸을 잃은 가슴 아픈 개인사와 많은 사람이 이별의 눈물을 흘린 미아리고개를 연결 지어 ‘단장(斷腸)의 미아리고개’를 작사했습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에 비유한 가사는 듣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이처럼 전쟁의 아픔이 스민 미아리고개에는 세월이 흐르면서 상처에 새살이 돋듯 주민들의 쉼터 역할을 해주는 공원이 조성되었습니다. 이곳에 세워진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비’는 슬픈 역사를 기억해 주고 있습니다. 날로 더워지는 여름, 미아리고개 공원을 방문해 잠깐의 여유를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다음달에는 만해 한용운의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 1964년 미아리 도로 공사 (서울기록원)
▲ 1996년 미아리고개 (성북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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